오일쇼크의 영향과 세계대공황
1974-75년 공황에서 각국의 공업생산 감소율은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 이후 가장 컸다. 미국의 공업생산은 1973년 11월-1975년 4월의 17개월 동안 13.8% 감소했고, 서독은 1973년 12월 1975년 5월의 26개월 동안 12.3% 감소했으며, 영국은년 10월-1975년 5월의 19개월 동안 11.0% 감소했고, 일본은년 12월-1975년 2월의 14개월 동안 21.4% 감소했다.
이 공황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흔히들 OPEC(제3세계 주요 석유수출국의 카르텔)이 1973년 10월-1974년 1월에 석유 가격을 배럴당 3달러에서 11.65 달러로 네 배 인상했기 때문에, 공황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황의 '방아쇠’(trigger)에 관한 이야기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총알이 폭발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총알을 넣지 않고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 봐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유가 폭등 이전에 이미 세계경제를 공황에 빠뜨릴 조건들이 성숙하고 있었으며, 유가 폭등은 공황을 촉발했을 따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1970-71년의 경기 후퇴
세계 기업 이윤의 추이를 살펴보면, 주요. 선진국의 제조업의 이윤율은 대체로 1960대 중반의 최고 수준으로부터 1973년에는 거의 30%나 저하했다.
미국의 예를 보면, 기업 전체의 이윤율은 1960년에 22.3%로 최고 수준을 기록했는데, 1973년에는 14.8%로 폭락했고, 제조업의 이윤도 1960년에 34.9%로 최고 수준을 기록했지만 1973년에는 22.5%로 폭락했다.
이윤율이 자본가의 투자능력과 투자의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이윤율의 폭락은 경제를 침체에 빠뜨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1970-71년의 경기후퇴가 이것을 가리킨다.
이윤율을 저하시킨 요인은 여러 가지였다. 첫째, 주요 산업들(예: 섬유산업, 자동차산업, 조선업, 석유화학공업, 철강업, 가전산업)이 수요 감퇴, 경쟁 격화, 저생산성, 과잉설비 등의 문제점에 부닥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환경오염이나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 가면서 기업은 수익을 낳지 않는 설비에 투자해야만 했고, 노동자들은 포드주의적 단순 반복 노동에 대해 무단결근 등으로 대응함으로써 노동생산성이 상승할 수 없었다.
둘째,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격화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963년 5월 혁명 이래 임금 수준이 대폭 상승했고, 이탈리아에서는 1969년 가을부터 북부 공업지대에서 주변 노동자들(이탈리아의 남부와 중부에서 이민 온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임금 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또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은 사회복지제도의 개선과 확대를 추진했다. 보건과 교육을 위한 지출, 그리고 소득보조(실업자에 대한 실업수당, 퇴직자와 노령자에 대한 노후연금, 저소득층에 대한 각종 보조) 등 사회복지비는 1960-70년에 국내총생산의 증가율보다 더욱 크게 증가했다. 이리하여 사회복지비/국내 총생산의 비율은 1970년대 초 프랑스 22.4%, 서독 22.1%, 영국 18.2%, 미국 17.1%, 일본 9.9% 였다.
셋째, 국제통화제도가 불안정적이어서 외환투기나 골드러시(gold rush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는 운동)가 자주 발생함으로써 국제화폐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60년대 중반 이래 수입 초과, 대외원조, 베트남 전쟁, 대외투자 등으로 대규모의 달러를 해외로 유출했기 때문에, 세계화폐로서의 달러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해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는 대소동이 여러 번 일어났다. 결국 닉슨(R. Nixon)은 1971년 8월 15일 달러를 금으로 태환 하는 제도를 폐기한다고 선언했고, 1973년 3월 모든 나라는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1972-73년의 투기적 벼락 경기
각국 정부는 1970-71년의 경기후퇴를 해소하기 위해 재정금융의 팽창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1972년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 해여서 미국 정부는 팽창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팽창정책 때문에 무역수지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독과 일본에게 마르크와 엔의 평가절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과 일본은 화폐 평가절상이 자국 상품의 국제경쟁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해 평가절상에 반대하고, 그 대신 무역흑자로 들어오는 달러와, 환율 변동을 노려 들어오는 투기성 자금(hot money)을 빨리 사용해 버리려고 했다. 대내적으로는 공공사업 예산을 미리 집행했고, 금리를 계속 인하해 투자를 촉진했으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투자를 증대시켰고, 대외적으로는 해외투자를 적극 장려했고 원자재를 대규모로 수입해 비축하게 했다.
재정금융의 팽창정책으로 이자율이 낮고 대출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농산물과 광산물의 원자재 가격이 공급 부족으로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1972-73년에는 세계적인 투기 붐이 일어났다. 계피·설탕·목재·알루미늄·곡물·금·골동품의 가격이 폭등했으며, 또한 토지·건물·주식에 대한 투기가 대규모로 일어났다.
다시 말해 제조업 등 산업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투자가 이윤율의 저하로 정체함에 따라, 금융기관의 방대한 여유 자금이 원자재, 부동산 그리고 주식의 매입에 대부된 것인데, 매매가 빈번하게 이루어짐으로써 가격은 급등했다. 일본에서는 1972년 7월 1973년 3월에 목재 가격은 2.24배, 콩 가격은 4.76배, 모사 가격은 2,08배, 생사 가격은 1.94배, 면사 가격은 1.9배 폭등했고, 도쿄의 주가지수도 1971년 1월의 148.05에서 1973년 1월에는 422.48로 급상승했으며, 토지 가격도 1970년 3월 1973년 3월에 64%나 상승했다.
1973년 10월~1974년 1월의 유가 폭등
1973년 10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OPEC은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중단시키기 위해 석유수출의 삭감과 수출 금지(예컨대 미국에 대한 수출 금지)를 결정했으며, 석유 가격을 네 배나 인상했다.
유가인상이 1974-75년 공황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가인상 때문에 선진국의 구매력이 OPEC으로 이전함으로써, 선진국에는 유효수요가 부족하게 되어, 생산이 격감하고, 실업이 격증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물론 OPEC이 유가인상을 통해 선진국과 후진국으로부터 대규모의 달러를 흡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달러를 OPEC의 금고 속에 넣어 둔 것은 아니었다.
OPEC의 각국 정부는 야심적인 개발계획을 세워 선진국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생산재와 소비재를 수입했고, 나머지의 잉여 달러는 주로 선진국의 은행에 예금했다. 선진국의 은행은 예금으로 받아들인 석유달러(petro-dollar)를 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후진국에 대출함으로써 후진국이 선진국으로부터 종진과 마찬가지로 생산재와 소비재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한국 등이 외채위기에 빠진 것도 1970년대 중반 이래 선진국의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석유달러를 차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가인상, OPEC으로 구매력 이전 → 선진국의 구매력 부족 생산의 격감 1974-75년 공황이라는 논리는 옳지 않다. 유가인상이 세계경제에 미친 영향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유가인상은 석유를 많이 소비하는 산업에 먼저 타격을 가하고, 나아가서 경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석유를 에너지나 원료로 사용하는 산업은 유가인상에 따라 수익성이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도산하거나 생산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이 산업에 기계나 원자재를 공급하던 산업들도 제품의 판로가 막히자 도산하게 되었다.
둘째, 유가인상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화함에 따라 각국 정부가 1974년 봄부터 긴축정책을 채택하게 되었고, 이 긴축정책 때문에 모든 투기가 몰락하게 되어 신용공황과 은행 공황 및 산업 공황이 심화했다.
오일쇼크 공황의 전개과정
1972-73년의 벼락 경기로 원자재 · 부동산·주식의 가격이 폭등하고, 더욱이 유가까지 폭등해 인플레이션이 급속히 진행했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1973년 말부터 재정금융의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석유를 원료나 에너지로 사용하는 산업이 유가인상으로 타격을 받아 경제 전체가 판매 부진과 과잉생산에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투기꾼들이 도산하게 되었으며 이들에게 대출한 금융기관들도 도산했다.
1974-75년의 공황은 상업, 부동산업, 건설업의 파산에서 시작했다. 또한 석유 가격이 폭등하자 자동차 수요가 급감해 자동차산업이 타격을 입었으며, 이어서 섬유, 전기기기 · 건축자재 · 석유 화학 공업이 타격을 입었다.
철강, 가구 공업은 1974년 이름까지는 공급 부족 상태였으나 곧 공급과잉으로 전했으며, 석탄·석유·곡물 분야는 상당한 기간 동안 공급 부족 상태였다. 각국의 공업생산지수는 크게 감소했지만 인플레이션은 계속 진행되었다.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병존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rilation)은 196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생산 저하의 정도와 기간,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진행속도에서 1974-75년의 공황은 더욱 악화된 형태였다.
왜 이렇게 악화되었는가?
첫째, 1973년 말의 긴축정책으로 다수의 기업이 도산하고 주요 금융기관까지 도산 위기에 빠지자, 정부는 구제금융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긴축정책이 중단되고 기업의 상품 투매 → 상품 가격 폭락이 어느 정도 저지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독과점 기업들이 석유 가격과 원자재 가격의 상승을 제품 가격에 전가했기 때문이다. 셋째, 노동조합은 실질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화폐 임금의 인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1976-77년부터 상당히 약화되었다. 왜냐하면 완제품과 원자재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고, 기업들이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가격 인하 경쟁을 시작했으며, 노동조합은 실업 증대로 임금인상을 요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4-75년 공황은 실업을 격증시켰다. 한편으로는 생산이 감소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해 노동 절약적인 생산방법을 도입하고 노동조직을 개편했기 때문이다.
또한 1950-73년의 장기 번영기에 대규모로 취업한 부녀자 · 청소년 · 소수인종 그룹·외국노동자들은 쉽게 해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복지비를 축소하자, 학교나 병원이나 사회복지부문에 고용되어 있던 봉급생활자들이 대규모로 실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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